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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글/다음영화 - 괴작익스프레스&임정원

북한이 만든 액션 영화 [명령-027호]

by flexwave 2021. 12. 6.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액션 영화에 푹 빠진 적이 있기 마련이다. 이소룡의 호쾌한 액션을 보고 쌍절곤 돌리는 연습을 하거나, 성룡의 인간미 넘치는 코믹액션을 흉내 내는 시기가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력을 중시하는 나라, 북한의 소년들은 어떨까? 물론 알려진 바로는 북한 당국은 외국의 ‘녹화 기록물’을 보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적 선전물이 대다수인 북한 영화 중, 한국이나 홍콩의 액션영화에 못지않은 수준의 액션영화가 있다. 바로 <명령-027호>다.
<b> 표지부터 북한 느낌이 물씬 난다. 조선 2.8 예술영화 촬영소에서 제작되었다. </b>
영화 자체의 내용은 사실 여느 전쟁영화들과 별다를 바 없다. 북한군 특수부대가 고된 훈련을 거쳐 남한 지역에 침투하여 온갖 역경을 뚫고 남한의 군사시설을 파괴한다. 일부는 작전 중 전사하고, 일부는 귀환한다. 그리고 이들의 지휘관은 돌아오지 못한 요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b> '남조선 국군' 군복을 입고 훈련받는 북한 군인들. 팔에 열쇠부대 마크가 보인다. </b>
<b> 여성 고정간첩과 접선을 명받은 북한 특수부대. 고정간첩이 미인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b>
이 영화는 권격 영화가 북한땅에서 제작되면 어떻게 될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획단계부터 여타 다른 전쟁영화와 다르게 북한식 태권도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목표로 제작되었다. 대부분 액션영화가 그렇듯, 무술지도는 전문가들이 맡았는데, 북한에서도 최정예로 꼽히는 4.25 격술연구소의 구성원들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동시대 남한의 액션영화와 비교하면 오히려 나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지나치게 집착한 탓인지 중간중간 엉성한 구성이 많다. 적진에 잠입해서 몰래 작전을 수행하고 귀환해야 할 특수요원이 열차 안에서 불량배 같은 '남조선 군인'들에게 조롱당하는 민간인을 돕다가 정체가 드러나는 식이다. 고정간첩과 접선하는 방식도 영 똑똑지 못하다. 이러다 보니 첩보 활동 중인데도 동네 친구 만나듯이 국군에게 자주 발각돼 버리는 것이다.
<p> <b> 이 영화의 최대 장점.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액션 연기는 정말 볼만하다. 이 영화는 이것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b> </p>
<p> <b> 과장된 표현들도 재밌다. 카바레에서 포크를 던져서 급소를 맞추고, 의무실에서 메스를 던져서 적을 살해한다. 와이어 액션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b> </p>
또한 심각할 정도로 당시 홍콩 영화에서 베껴온 티가 난다. 특히 이소룡 스타일의 괴성이나 표정이 많다. 물론 배우들 개개인의 역량은 훌륭하지만, 격투 장면에서 박진감을 위해 장면을 빨리 돌린다거나, 쓸데없이 배경의 건물이 부서진다거나 하는 장면은 분명 당시 홍콩 영화식 연출이다. 더 나아가 발로 자동차 핸들을 조작하면서 손으로는 기관총을 쏘는 장면 등의 엄청난 액션들이 요소요소에 숨겨져 있다.
<p> <b> 조직 폭력배처럼 등장하는 ‘국군 소령’. 회의 장면은 마치 &lt;대부&gt;의 한 장면 같다. 이런 식으로 남한사회를 비꼬는 내용이 많다. </b> </p>
북한뿐만 아니라, 80년대 당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의 소년들은 홍콩이나 미국의 액션 영화를 공식적으로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명령-027호>는 마치 대체재처럼 자연스럽게 공산권 국가에 수출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북한 당국은 자본주의 진영의 액션영화 못지않은 어떤 것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영화 자체로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그러나 북한군을 괴물이나 거지로 묘사하던 <똘이 장군> 같은, 그러니까 80년대 당시의 남한에서 양산되던 반공영화들과 데칼코마니처럼 다른 방향으로 닮아있다. 박노자 교수는 이 영화에 대해 “왜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영화를 보고 환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명령-027호>는 분단이 낳은 괴작이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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