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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무지가 만든 괴작 [국가의 탄생]

by flexwave 2021. 12. 6.

편견과 무지가 만든 괴작 [국가의 탄생]

656 읽음2014. 0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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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무지가 만든 괴작 [국가의 탄생]
편견이 편견이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여성에 대한 비하가 그랬고, 인종에 대한 비하가 그랬다. 그러한 차별은 당연한 ‘구분’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적 위치와 권력에 따른 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여기,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초기 영화사의 발전을 견인했던 작품이 있다. 오늘의 괴작은 [국가의 탄생](1914)이다.
 
[국가의 탄생]은 미국 남북전쟁 이후 두 명문가문의 가정사를 통해 미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는 서사시를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당시 영화는 단순히 연극을 필름에 담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거장 그리피스 감독은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 동물과 사물을 이용한 다양한 상징, 등장인물의 갈등 등을 이용해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가능성을 세련되게 증명했다. 영화를 당당한 하나의 예술로 끌어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촬영장에서의 D. W. 그리피스.
<br> 메가폰을 들고 열의에 차서 소리 지르는 감독의 전형은 이 사람에서 시작되었다

영화는 남북전쟁 이전의 소박하고 ‘순수’했던 남부의 문화가 전쟁과 대립으로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일견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민족주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편견에 가득 차 있다. 미국의 정신과 미국인의 민족적 가치는 전쟁을 통해 훼손되고 있고, 짐승 같은 흑인들과 그에 부화뇌동한 북부의 자본가들은 남부를 파괴여 백인들의 전통과 가치를 유린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왼쪽은 영화 전반부. 전쟁 이전의 소박한 남부의 일상을 다룬다.
<br> 오른쪽은 남부를 약탈하는 북부 군대들. 흑인들은 유독 잔인하고 거칠다.

링컨 암살 장면이나 남부 군대의 항복 장면은 역사적인 사진을 통해 정교하게 재현했다.
<br> 이 외에도 독창적인 카메라 기법은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국가의 탄생]의 흑인들은 백인 여성을 겁탈하고, 백인의 참정권을 제한한다. 흑인 국회의원들은 정치를 쥐락펴락하며, 백인들을 철저히 차별한다. 이에 백인들은 흑인의 위협에 맞서 KKK 단을 조직한다. 무자비한 흑인에 맞서 아름다운 백인의 혈통과 전통을 지켜낸다. 정말 할 말이 없는 판타지 중의 판타지다.

당시에는 백인 배우들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흑인을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br>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상이다.

흑인들을 마을에서 몰아내는 KKK 단.
<br> 약자를 지키는 정의의 기사로 등장한다.

D.W. 그리피스는 영화를 만드는 재주는 천재적이었지만, 도덕적인 관념은 영아 수준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흑인 하녀에게 영화 티켓을 쥐여줄 정도로 인종적 편견에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물론 이 영화는 개봉 후 예술적인 면에서는 엄청난 찬사를 받았지만, 미국 각지에서 흑백 대립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Nation’이라는 단어는 ‘국가’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종종 ‘민족’이라는 단어로도 쓰인다. 이 영화는 외부세력에 맞서 민족을 지키는 민족주의적 화법을 따른 전형적인 민족주의 영화다. 그러나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더더욱 슬픈 점은 당시에는 이렇게 자기 민족을 위해 타민족을 억압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 참담한 편견은 훗날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대재앙으로 이어진다.

여성들을 구하고 마을을 지켜낸 KKK 단원들.
<br> 이런 장면들 때문에 [국가의 탄생]을 공공 도서관에 비치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 보자면 걸작이고, 도덕적으로 보자면 괴작이다. 무지했던 인류가 아무 생각 없이 담아 놓은 시대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다시는 돌아가면 안 되는 그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어쩌면 우리가 반드시 봐야 하는 괴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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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정원
2014.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