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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와 작가주의의 경계선 [인형의 골짜기를 넘어서]

by flexwave 2021. 12. 6.

포르노와 작가주의의 경계선 [인형의 골짜기를 넘어서]

27,333 읽음2014.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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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와 작가주의의 경계선 [인형의 골짜기를 넘어서]
러스 메이어는 포르노가 산업화하기 전인 1960년대에 이미 파격적인 노출을 카메라에 즐겨 담았던 감독이다. 그는 지나치게 가슴이 큰 여배우에 집착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파격적인 연출 스타일로 영화 학도들에게 추앙받기도 했다. 오늘의 괴작은 러스 메이어 감독의 메이저 데뷔 작품 [인형의 골짜기를 넘어서](1970)다.
켈리, 케이시, 페트는 3인조 여성 밴드다. 그들은 유능한 프로모터를 만나 큰 성공을 거둔 이후, 젊음을 환락으로 낭비한다. 켈리는 매니저이자 남자친구인 해리스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 페트 역시 순진한 남자친구 대신 유명 복서와 눈이 맞는다. 케이시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민하다 여성 디자이너와 사랑에 빠진다. 점점 과격한 약물과 섹스가 오가던 어느 날, 파티장에서 잔인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스토리상으로는 밴드의 흥망성쇠를 다룬 보통의 음악 영화와 크게 다를 점이 없다. 전편인 [인형의 골짜기](1967) 역시, 쇼비즈니스 전쟁 속에서 3명의 젊은 여자가 성적인 착취를 당한다는 내용이었으나, 노골적인 섹스 장면이 없어 PG 13등급을 받았다. 그러나 [인형의 골짜기를 넘어서]는 보란 듯이 X 등급을 받았다. 섹스 장면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편이라서, 편의에 따라 러스 메이어의 영화를 ‘소프트 포르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일부는 그를 단순히 야한 영화를 양산하는 그저 그런 감독으로 취급했다. 감독 자신도 무척 견디기 힘들었던지, 한 인터뷰에서 ‘가슴 큰 여자들을 좋아하는 것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도 마찬가지’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러스 메이어의 가슴 큰 언니들은 단순히 가슴만 큰 게 아니다. 러스 메이어의 영화에 나오는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다. 그녀들의 욕망엔 거침이 없고, 그것이 때로 부도덕하거나 범죄에 해당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종종 가슴뿐만 아니라 골격도 큰 러스 메이어의 여인들은 기존의 수동적인 여성상을 벗어나, 남성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압도하는 캐릭터들이 많다.

또한, 러스 메이어는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고집하던 장인이었다. 그리고 할리우드의 일반적이고 안정적인 연출에서 벗어나 갖가지 실험적 연출기법을 감행하던 전사였다. 장면을 마구 난도질해서 영화 줄거리의 순서와 관계없이 편집하거나, 갑자기 단어만 나열되는 대사를 몽타주로 병치시키기도 한다. 여러 가지 색의 조명을 배합해서 몽롱한 분위기를 내는 그의 작품은 전위적인 영상 예술에 가까웠다.
포르노 산업이 일반화되어 더 과격한 표현이 용인된 후에도, 러스 메이어는 한 번도 하드 코어 섹스 신을 찍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8mm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던 어린 시절부터, 2차 대전의 종군 카메라 기자를 거치고, 플레이보이지를 거쳐,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스타일을 완성해나가는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자신이 가고 싶은 방식으로 가는 예술가였다. [인형의 골짜기를 넘어서]의 각본을 썼고, 죽는 날까지 러스 메이어의 영화 친구였던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자서전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러스 메이어가 얼마만큼 영화에 대해 진지한 감독이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러스 메이어 자신 또한, 작품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의 작품엔 열정이 담겨있으며, 악이 아닌 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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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