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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글/다음영화 - 괴작익스프레스&임정원

북한이 만든 액션 영화 [평양 날파람]

by flexwave 2021. 12. 6.
‘괴작 익스프레스’에서는 북한의 80년대 액션 영화 [명령-027호]를 소개한 적이 있다. [명령-027호]를 통해 훔쳐본 당시의 북한 영화는 배우들의 역량이나 스태프들의 촬영기법은 훌륭했으나,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야만 했던 감독의 무리한 연출이 한계를 드러냈었다. 이후의 북한 영화는 어떨까?
<b> 북한 영화 도입부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조선 영화’ 로고. 오른쪽은 눈밭에서 펼쳐지는 [평양 날파람]의 대규모 격투씬. </b>
90년대,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북한 사회는 국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고립되어갔다. 특히, 90년대 후반은 북한 정부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사용하던 시기다. ‘고난의 행군’은 원래 김일성이 항일 투쟁 중 만주의 혹한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이룩한 100일 동안의 전설적인 행군을 일컫는 단어다. 그러나 당시 힘든 정국을 이끌어가기 위해 김정일이 아버지의 신화를 이용하여 전략적으로 내세운 구호이기도 하다. 당시의 이런 상황 때문에 2000년대의 북한 영화는 제작 자체가 드물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북한 경제가 그나마 조금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이전과는 약간 다른 양상의 북한 영화가 등장한다. 외국 영화를 흉내 내면서 무거운 정치적인 주제를 많이 벗어던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을 타고 만들어진 액션 영화가 있다. 바로 [평양 날파람](2006)이다.
<b> 영화의 주연을 맡은 미남 배우 리용훈. 실제로 북한에서 인기가 좋다. 오른쪽은 감초 캐릭터들, 본격적인 정치 선전용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유머 코드가 많다. </b>
[평양 날파람]은 무예 전승서 ‘무예도보통지’를 지키기 위한 민족 무예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배경은 구한 말, 일제는 한민족의 전통 무예를 말살시키기 위해 전승서를 빼앗으려 한다. 이를 지키기 위해 민족 무도가들이 나선다. [평양 날파람]을 보면 북한의 영화 촬영기법과 연출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북한 정부의 정치적인 메시지를 무리하게 담으려는 시도도 많이 줄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는 개연성을 잃지 않아,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사실 이전의 북한 영화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기 위해 기초적인 흐름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b>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비중이 작지 않다. 키스씬 하나 없지만, 저 횃불만으로 충분히 ‘뜨거운’ 연출을 보여준다. </b>
무엇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축에 러브스토리가 있다. (아쉽게도 본격적인 성애 장면은 없다.) 나름의 방법으로 발전해온 북한 태권도의 몸놀림을 보는 것도 큰 재미다. [평양 날파람]의 액션들은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들처럼 초인적인 배우들이 멋지게 합을 맞춘 양식 미와 ‘본 시리즈’ 이후 대세가 된 실전형 액션씬의 리얼리티가 섞여 있는 명장면들이 많다.
<b> 민족 무예가들의 수련 장면. 자신의 몸집보다 큰 통나무를 끌거나, 물 항아리를 단번에 격파한다. </b>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평양 날파람]이 정치적인 메시지 강박을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평양 날파람]의 주된 이야기는 일제의 간악한 흉계를 물리치고 민족 전통을 보전한 아름다운 선조들의 투쟁이고, 이것은 결국 북한정부가 스스로 내세우는 정통성의 한 축이기도 하다.
<b> 일본군에 잡혀갈 것을 알면서도 일본의 무도가들과 맞서기 위해 무술대회에 나타난 민족 무도가들은 온갖 방해공작 속에서도 정정당당하게 승리한다. </b>
여기에서 일본 무도가들은 유도의 대가들이지만, 불리할 때는 거리낌 없이 총과 칼을 사용한다. 당연히 우리의 민족 무도가들은 어느 순간에도 정정당당하게 맨몸으로 상대를 쓰러트린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민족 무도가들이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고 나면, 평양 시내의 ‘태권도 전당’이 등장하며 엔딩 크래딧이 올라간다. 선조들의 위대한 항일정신은 오롯이 북한 정부의 정통성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b> 엔딩 크래딧에 등장하는 ‘태권도 전당’. 실제 태권도 선수들의 수련장면과 경기 장면이 펼쳐진다. </b>
그럼에도 [평양 날파람]은 분명 이전의 북한 영화들보다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다. 언젠가 남북한이 합작으로 만들 완벽한 액션 영화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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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정원